기독교강요강해(147)_프린트물_202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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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9-08 19:54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7)
[ 제3권 제22장 9항 – 제22장 11항 ]
성경본문: 에베소서 1:3-4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9항. 사람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가 선택과 연결되는 것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바로 이런 공로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궤변에 시간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로에 대한 예지는 예정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예정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도 부를 수 있다. 즉 예정에 대한 특별한 평가에 의해서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공로로 영광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선택에 있어서 단지 그의 선하심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지혜있는 체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도 궤변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토마스의 궤변을 반박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선택된 자들에게 공로를 근거로 어느 정도의 영광이 예정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예정하시고, 그 은혜에 의해서 그들이 영광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우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항의를 제시하여, 은혜를 받기로 예정되는 것은 생명을 받기로 선택되는 것에 종속되는 것 곧 후자에 대한 일종의 시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은혜가 예정된 사람들은 훨씬 전에 영광을 가지기로 결정된 자들이며, 주께서 그 자녀들을 선택에서부터 의롭다 하시는 데까지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은 은혜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의 원인이고,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분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논쟁은 무익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교회의 어떤 저술가가 “하나님의 선택을 공로에 돌리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바르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0항.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부르시면서 몇 사람만 선택하여 받아들이신다면 자가당착이 될 것이라고 항의합니다. 이와 같이 이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속의 보편성은 특수한 은혜의 구별을 배제합니다. 또 어떤 온건한 사람들도 이렇게 말함으로써 진리를 압박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막으며, 여러 사람의 호기심을 억제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생각이나, 모호한 회피는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 의도도 시인할 수 없습니다. 거만하게 선택을 욕하는 자들은 구역질이 날 정도의 궤변이 아니면, 수치스러운 오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곳에서, 성경이 이 두 가지 생각 즉, 외적인 전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오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회개와 믿음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두 가지 생각을 조화시킨다는 것을 말했고, 곧 그 일부를 반복하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으므로 그것을 부정합니다. 한 도시에는 비가 올 것이나 다른 도시에는 한발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시며(암4:7),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선언하시는 분은(암8:11) 모든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어떤 고정된 법을 만드심으로써 스스로를 구속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을 금하시고(행16:6) 그를 비두니아로부터 마게도냐로 향하게 하신 분은(행16:7),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보화를 분배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이십니다. 그의 구원의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특별히 보내신다는 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보여주십니다. 즉 그들만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인류 전체가 차별 없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십니다(사8:16). 그러므로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서만 - 그 개개인을 위해서만 -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구원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도 실제로 똑같이 유익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히 이 가르침을 그릇되게 저속화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믿음의 선물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사야는 “주의 팔”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사53:1). 만일 이사야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여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와 사악한 생각으로 복음을 멸시하는 결과가 생긴다고 했다면, 보편적인 소명의 이 측면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람들에게 팔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가르치는 것은(사53:1) 결코 사람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는 다만, 믿음은 특별한 선물이므로 외면적인 가르침을 듣기만 해서는 무익하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나는 설교만이 또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느냐고 이 교사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요1:12) 할 때, 확실히 여기에서는 뒤섞여진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신자들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요1:13)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말씀 사이에는 상호 일치가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씨가 가시덤불 속에나(마13:7) 돌밭에(마13:5) 떨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불복종의 태도를 고집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는 눈과 들을 귀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오지 않을 줄을 아시면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어떻게 모순이 없다고 할 것입니까? 어거스틴의 대답을 빌리겠습니다. “그대는 나와 논쟁을 하려는가? 나와 함께 놀라며 ‘오, 깊도다!’하고 감탄하라. 우리 두 두 사람은 서로 두려운 마음으로 일치하여, 오류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자.” 그뿐 아니라, 바울이 증거하는 것과 같이, 선택이 믿음의 모체라면, 선택이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일반적이 아니라고 하는 논법을 그들에게 돌려보냅니다. 그 이유는, 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서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할 때에(엡1:3-4),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리 택하신 사람을 값없이 비추어 주시는 것임을 알라고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권고합니다(딛1:1), 베르나르드가 한 말은 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라고(마13:11) 말씀하실 때에, 그의 친구들은 각각 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누군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롬8:29), 또 하나님의 위대한 은밀한 계획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2:19)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신 일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자기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신 사람들 이외에는 이렇게 위대한 비밀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조금 뒤에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103:17). 예정하셨으므로 영원부터요, 하늘의 복을 주시므로 영원까지이다. 전자는 처음이 없으며, 후자는 끝이 없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베르나르드를 증인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주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6:46).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얼굴의 광채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또 참으로, 믿음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면, 믿음을 선택과 연결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이 순서는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39-40).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다면, 그의 아들을 그들 위에 두시고 모든 사람을 신앙의 거룩한 유대로 그의 몸에 접붙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담보 곧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사람들을 위해서 보존된 담보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요10:4-5).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양들의 귀를 주께서 뚫으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은 이길 자가 없는 하나님의 힘이 보호함으로써 영원히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가르치십니다(요10:29). 따라서 불신자들은 그의 양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요10:26).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 가운데(사8:16,54:13 참조), 그들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인용한 증거들은 견인을 의미하므로, 동시에 선택의 변함없는 항구성도 증명합니다.
11항. 제외되는 것도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생기는 일이다
이제 버림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려 합니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도는 동시에 관심을 보입니다.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가 없이 은혜를 받게 된 것과 같이, 에서는 아직 범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습니다(롬9:13). 우리가 행위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일을 사도가 보지 못했다는 것같이 되어,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가 행위를 보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선악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역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에 그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는 문제를 언급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의 의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옹호할 수 있을 듯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즉 에서에게는 그의 사악함에 따른 보상을 주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버림을 받은 자들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움을 받는다고 하는 다른 해결 방법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는 결론을 첨가합니다(롬9:18). 바울이 두 가지를 다 하나님의 결정에만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다른 이유를 확정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시는 데 대해서도 그의 뜻 이외에 아무 이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강퍅하게 만드시기도 한다고 하실 때, 이 말은 하나님의 뜻 이외에서는 다른 원인을 찾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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